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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옹야편 제19장: “상대하지 마라” 구절의 원문과 해석, 그리고 교육적 의미

by 크리드로얄워터 2025.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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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옹야편 제19장: “상대하지 마라” 구절의 원문과 해석, 그리고 교육적 의미

옹야편 제19장의 원문과 번역

원문: 「子曰: 中人以上, 可以語上也; 中人以下, *不可以語上也.」 
해석: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평범한 중간 수준 이상의 사람에게는 높은 수준의 것을 말할 수 있으나, 중간 이하의 사람에게는 높은 수준의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위는 『논어』 <옹야(雍也)> 편 제19장의 구절로, 사람의 수준에 따라 가르침이나 대화의 내용을 달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해력이 어느 정도 높은 사람에게는 심오한 가르침(“상”, 높은 도리)을 전할 수 있지만, 수준이 낮은 사람에게는 그런 높은 도리를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흔히 이 취지를 **“상대하지 마라”**라는 간략한 표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자신과 수준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그에 맞지 않는 높은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대하지 마라’ 표현의 맥락과 현대적 이해

위 구절에서 강조된 “상대하지 마라”라는 표현은 원문에 그대로 등장하는 문구는 아닙니다. 원문에서는 “不可以語上也”라고 하여 “높은 것을 말해줄 수 없다(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를 현대어로 옮기면서 **“수준이 맞지 않으면 상대하지 말라”**는 식으로 요약한 것이지요. 즉 여기서 ‘상대’란 일반적인 인간관계를 통틀어 아예 상대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학문이나 도덕적 수준이 크게 차이날 경우 억지로 높은 수준의 가르침을 주거나 논의를 펼치지 말라는 맥락입니다.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각자의 재능과 수준에 맞게 가르침을 달리하곤 했습니다. 실제로 『논어』의 다른 대목을 보면, 똑같이 “인(仁)”에 대해 물어도 공자는 질문자의 성향과 능력에 맞추어 각기 다른 대답을 했습니다 . 이는 공자가 제자들의 수준을 충분히 고려하여 교육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공자의 교육 원칙을 후대에 “因材施教”(인재시교) – 재능과 자질(材)에 따라 가르침을 베푼다 – 라고 부르게 되었고 , 오늘날까지도 교육 분야에서 중요한 원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

예시: 공자는 같은 질문이라도 자로(子路)와 염구(冉求)에게는 정반대의 답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는 우유부단해서가 아니라 각 제자의 기질에 맞는 적절한 가르침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 마찬가지로, 학습자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높은 가르침을 주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상대하지 마라”라는 말에 담긴 맥락입니다.

따라서 *“상대하지 마라”*는 사람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의 수준에 맞지 않는 높은 수준의 이야기나 가르침은 피하라는 의미입니다. 현대적으로 풀면 “듣는 이의 수준을 고려하여 이야기하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는 깊은 가르침을 무리해서 주지 마라”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통 주석에 나타난 해석과 의미

공자의 이 말씀에 대해 옛 주석가들도 교육 방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해설을 남겼습니다. 주희(朱熹)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합니다:

주희 주석: 「言敎人者, 當隨其高下而告語之, 則其言易入而無躐等之弊也.」 
– “남을 가르치는 자는 반드시 그 사람의 높고 낮음(수준)에 따라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하면 그 말이 쉽게 (마음에) 들어가고, 단계를 뛰어넘는 폐해가 없게 된다.”

여기서 주희는 *“語(어)는 告(고)이다”*라고 하여, **“語”를 일러준다(알려준다)**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 즉 남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수준 고하(高下)에 따라 내용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가르침이 쉽게 받아들여지고, 억지로 건너뛰는(躐等) 부작용이 없다는 설명입니다 .

또한 남송(南宋)의 학자 **장경부(張敬夫)**도 이 구절을 상세히 해설했는데, 그 요지는 이렇습니다:

장경부 주석: “中人以下之質에 驟而語之太高하면, 非惟不能以入, 且將妄意躐等… 終於下而已矣. 故 就其所及而語之, … 漸進於高遠也.” 
– “중간 이하의 자질을 가진 사람에게 갑자기 너무 높은 것을 말해 주면 (그 말이)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망령되이 단계를 뛰어넘으려는 잘못된 마음만 생기게 되고… 결국에는 (발전하지 못하고) 낮은 수준에 머물고 만다. 그러므로 그가 미칠 수 있는 범위부터 말해 주어야 … (그렇게 하면) 점차 높고 먼 경지까지 나아가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석들의 공통된 해석은, 공자의 말씀이 교육에서 “순서와 단계”를 지키는 중요성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한 단계씩 밟아 올라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지 너무 높은 수준을 성급하게 가르치면 오히려 혼란을 주고 학습자의 성장을 저해한다는 지적입니다. 쉽게 말해, 아이가 걸음마도 떼기 전에 달리기를 가르치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석가들은 또한 이 구절의 “上(상)”이 구체적으로 “형이상의 도(道)”,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이치나 높은 철학적 진리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 **“중인(中人)”**은 재능이나 지혜가 평균적인 사람을 뜻하며, **“중인 이하”**는 그보다 부족한 자질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 결국 수준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이에게는 깊은 철학적 진리(형이상의 도)를 설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는 공자가 말하고자 한 교육 원칙인 “가능한 사람에게만 높은 도리를 말한다”는 뜻을 명확히 해줍니다.

공자가 전하고자 한 핵심 사상

공자의 핵심 메시지는 “가르침은 받는 이의 수준과 자질을 고려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말한 因材施教(인재시교), 곧 재능에 따른 맞춤 교육의 사상으로 집약됩니다 . 공자는 교육에서 획일적인 접근을 지양하고, 개개인의 능력과 소양에 맞게 지도해야 함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실제로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은 “부자지언 성여천도 불가득이문야”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자공의 증언: 「子貢曰: 夫子之文章, 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 자공이 말하였다: “선생님(공자)께서 경전의 예악(禮樂)이나 시서(詩書)에 관해서 하신 말씀은 우리도 들을 수 있었지만, 인간의 본성이나 하늘의 도리에 관해서는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기록은 공자가 **형이상학적이고 난해한 주제(인간의 성성과 하늘의 이치)**에 대해서는 함부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펼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 즉, 공자는 주로 현실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예악, 시서 등의 “文章”)을 위주로 교육하였고, 제자들의 역량을 벗어난 심오한 이론(“性與天道”)은 스스로 깨우치도록 남겨두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 이는 곧 *“중인 이하에게는 상을 말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교훈을 철저히 지켰다는 방증이며, “천도는 멀고 인간道는 가까우니(天道遠、人道邇)” 우선 눈앞의 인간다움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

요컨대, 공자가 이 구절을 통해 전하려 한 사상은 교육에 있어서의 실용성과 단계론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이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더 높은 진리를 전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무리하게 가르치지 말고 기다리라는 지혜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공자가 왜 **만인의 스승(萬世師表)**으로 추앙받는지 보여주는 대목으로, 각기 다른 제자를 적합한 방식으로 지도한 그의 교육 철학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

교육, 인간관계, 지혜 전수 측면의 철학적 의미

공자의 이 말씀은 단순히 당시의 제자 교육뿐만 아니라, 현대의 교육 이론, 인간관계에서의 소통법, 지혜 전수의 방식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의미를 지닙니다. 아래에서 몇 가지 측면별로 그 철학적 의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교육적 측면: *“중인以上에게는 上을 말하고, 중인以下에게는 上을 말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학습자의 수준에 맞춘 교육(개별화 수업)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오늘날 말로 하면 *“가르침은 학습자의 이해 수준, 발달 단계에 부합해야 효과적이다”*라는 것입니다 . 이 원칙은 현대 교육학의 “적절한 난이도의 도전” 개념이나 “스캐폴딩(scaffolding)”, “근접 발달 영역” 이론과도 통합니다. 너무 쉬운 내용만 주어지면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지만, 너무 어려운 내용을 주입하면 흥미와 자신감을 잃고 학습이 좌절되지요. 공자는 이미 2500년 전에 학생 개개인의 능력 차이를 인정하고, 그에 따라 가르치는 유연한 교육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 이런 맥락에서 *“상대하지 마라”*는 말은 결코 차별을 위한 구분이 아니라, 효과적인 교육을 위한 방편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인간관계적 측면: 이 가르침은 일상적인 인간관계와 소통에도 시사점을 줍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조언이나 지식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너무 높은 수준의 이야기를 하면 본인은 잘난 척한다고 오해받고, 상대는 위압감을 느끼거나 심지어 조롱할 수도 있습니다  . 따라서 효과적인 소통을 위해서는 상대의 눈높이에 맞추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공자의 말은 *“상대를 깔보지 말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라”*는 조언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이와 생산적인 대화를 하려면 그 사람의 지식 수준이나 경험 세계를 고려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너무 어려운 말만 해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얻기 쉽습니다. 공자의 가르침은 경청자에 대한 배려와 공감을 통한 소통의 기술을 일깨워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지혜 전수의 측면: 예로부터 깊은 지혜나 도는 아무에게나 함부로 전수하지 않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는 잘못 전하여지면 왜곡되거나 가벼이 여겨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자가 *“불가이어상(不可語上)”*이라고 한 것도 지혜의 전수를 신중히 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높은 지혜를 말해 주어봐야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비웃거나 무시할 수 있습니다  . 이는 듣는 이에게도 화가 되고, 지혜 자체의 권위도 실추될 수 있는 일이죠. 그래서 현명한 스승은 제자의 성취도와 인격을 살핀 후에야 더 깊은 가르침을 전합니다. 불교나 도가(道家)에서도 단계적 수행을 거쳐야 심오한 가르침을 전하는데, 공자 역시 학생의 “根性”(근기, 근본 자질)을 보고 때가 아니면 함부로 道를 말하지 않았다고 해석됩니다  . 요즘 말로 비유하면, **“진주는 돼지에게 주지 말라”**는 속담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아무리 값진 진리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와 그릇이 되어 있는 사람에게 전해야 비로소 빛을 발한다는 것입니다. 공자의 이 말씀은 지혜를 전하는 사람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리고 배우는 이의 자질과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동시에 일깨워 줍니다.

요컨대, 『논어』 옹야편 제19장의 *“중인 이하와는 상대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교육자와 지도자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교훈입니다. 무분별한 가르침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으며,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인내와 분별이 참된 지혜 전달의 일부임을 말해줍니다. 공자는 이를 통해 효과적인 가르침(교학)의 방법, 사람을 대하는 지혜로운 태도, 진리를 전수하는 데 필요한 신중함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하여, **“사람을 가르치거나 설득할 때에는 반드시 상대의 수준과 필요에 맞춰라”**는 금과옥조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 이는 곧 *“상대를 가려서 대하라”*는 오만이 아니라, “상대에 맞춰서 대하라”*는 지혜로운 도리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참고 문헌 및 주석: 공자의 원문과 주석 해설은 『논어집주』  를 참조했고, 관련 해석은 고전 한문 주석서와 현대 학자들의 해설을 인용하여 설명했습니다   . 이러한 다양한 주석과 해석을 종합하면, 공자의 이 한 마디 속에 담긴 교육 철학과 인간 이해의 깊이를 새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누구를 가르칠 때 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전하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갈 수 있도록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다음 단계의 지식을 전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공자가 말하고자 한 핵심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공자 『논어』 옹야편 제19장: “상대하지 말라” 구절 분석

구절 원문 및 번역

原文: 子曰: “中人以上, 可以語上也; 中人以下, 不可以語上也.”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중간 수준 이상의 사람에게는 높은 수준의 이야기도 말해줄 수 있지만, 중간 수준 이하의 사람에게는 (그런) 높은 수준의 이야기를 말해줄 수 없다.” 

위는 『논어』 “옹야(雍也)” 편 제19장의 원문과 그 번역이다. 여기서 **“중인(中人) 이상”**은 “중간 정도의 자질이나 이해력을 가진 사람 이상”을 가리키고, **“어상(語上)”**은 문자 그대로 “높은 것을 말하다”는 뜻이다. 즉 상대에게 “높은 수준(상의 上)의 이야기” 또는 이상적인 도리를 말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 마지막 구절 **“중인 이하… 불가이 어상야”**는 현대어로 쉽게 풀면 “그들과는 그런 높은 수준의 이야기를 하지 말라,” 곧 **“상대하지 말라”**는 의미로 요약될 수 있다.

주석 및 해설

중인(中人): 글자 그대로는 ‘중간 정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공자는 인간의 지혜와 자질에 따라 상중하로 등급을 나누어 보고 있다 . “중인”은 그 중 평범한 수준의 재능이나 지적 수준을 지닌 사람을 가리킨다. 주석가 왕숙(王肅)은 *“두 번 ‘중인’을 든 것은 그들이 위로도 아래로도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즉 중간 수준의 사람은 교육을 통해 위로 향상될 수도 있고, 반대로 놓아두면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이상(以上)의 “상(上)”: 여기서는 “위” 또는 “높은 것”을 가리킨다. 곧 ‘상급의 도리’나 ‘고상하고 추상적인 진리’를 뜻한다. 주석서 『논어집주』 등에서는 “상(上)은 **상지자(上智者)**가 아는 바”라고 풀이하여,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 아는 높은 이치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 일부 현대 학자들은 이를 형이상(形而上)의 진리, 다시 말해 **이상적 원리나 도(道)**를 뜻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 결국 “어상(語上)”이란 높은 진리를 말해준다, 깊은 학문을 논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어(語): “말하다, 일러주다”라는 뜻이다 . 흥미롭게도, 공자는 “가르치다(敎)” 대신 “말한다(語)”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공자의 교육 방식이 일방적인 주입이 아니라 문답을 통한 쌍방향 대화였음을 시사한다 . 제자들이 묻고 스승이 답하거나, 때로 스승이 물으면 제자가 답하는 식으로 대화 속에서 가르침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語上”은 높은 수준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가르친다기보다 함께 논의한다는 뉘앙스를 갖는다.

불가이 어상야(不可以語上也): 직역하면 “높은 것을 말해줄 수 없다”는 뜻이다. 상대하지 말라는 현대어 표현은 바로 이 부분에서 유래했다. 다만 공자가 의도한 바는 단순히 무시하거나 교제를 끊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들의 수준에 맞지 않는 높은 이야기까지는 하지 말라는 뜻이다. 즉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는 높은 차원의 대화를 시도하지 말라”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현대 해설자들은 *“중인 이하인 자들은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해줘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 이는 수준 미달의 상대와는 고매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함을 강조한 것이다.

엽등(躐等): 주석에 등장하는 한자어로, *“차례나 등급을 뛰어넘음”*을 가리킨다. 만약 학습자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높은 것을 가르치면, 분에 넘치는 착각이나 체계의 혼란(학습 단계 건너뜀)과 같은 폐해가 생길 수 있다는 경고이다  . 주희는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응당 그 높고 낮음을 따라 가르쳐야 한다. 그러면 그의 말이 쉽게 받아들여지고 **등급을 뛰어넘는 폐단(躐等之弊)**이 없을 것이다”*라고 주석하였다 . 결국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높은 가르침을 주면 혼란만 야기하고 학생에게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맥락과 공자의 본래 의미

이 구절은 공자가 자신의 교육 경험에서 얻은 통찰을 간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앞뒤 문맥상 특별한 질문자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공자가 제자들에게 교육 방법에 대해 직접 언급한 격언 형태의 말씀으로 이해된다. 공자는 늘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각자의 재능과 성품에 따라 다른 가르침을 주었다고 전한다 . 실제로 『논어』 다른 대목을 보면, 같은 질문에 대해 제자에 따라 정반대의 대답을 한 일화가 있다. 한 제자가 “바로 실천해볼까요?” 묻자 공자는 *“즉시 행하라”*고 답했지만, 또 다른 제자가 같은 질문을 하자 *“부모나 형에게 물어보고 행하라”*고 답하였다. 이를 본 다른 이가 공자의 일관성을 묻자, 공자는 **“한 사람은 지나치게 소극적이어서 용기를 북돋워 준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너무 혈기만 앞서서 신중함을 일깨워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처럼 공자는 학생 각자의 기질과 수준을 고려하여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응대한 것이다. 이를 가리켜 후대에 “인의(因材)하여 교를 시행한다”, 즉 **“인재(因材)시교”**라 하여, 맞춤형 교육의 이상적인 모범으로 삼는다.

옹야편 제19장의 이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학습자의 능력에 따른 교수법을 강조한 것으로, *“중간 수준 이상의 자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높은 이치까지 가르칠 수 있으나, 중간 이하의 자질을 가진 사람에게는 너무 높은 이치를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공자가 보기에, 태생적으로 뛰어난 인재(상지자)는 많은 것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지만, 지극히 둔한 사람(하우자)은 아무리 가르쳐도 변화시키기 어렵다 . 그리고 이 둘 사이에 있는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중인)은 잘 이끌면 높이 발전할 수도 있지만, 무리하게 가르치면 오히려 이해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따라서 교사의 역할은 이 평균 수준의 사람들을 잘 파악하여 알맞은 깊이의 가르침을 주는 데 있다. 공자는 바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제자 **범지(樊遲)**에 대한 언급에서도 암시되는데, 공자는 범지가 지혜와 인(仁)을 묻자 각각 “사람을 사랑하는 것”,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라고 아주 간략히만 대답했고, 범지는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 물러난 일화가 있다 . 범지는 공자가 판단하기에 ‘중인 이하’의 범주, 즉 심오한 설명을 해줘도 소화하지 못할 유형이었기 때문에, 공자는 억지로 더 설명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안 된 이에게는 더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공자의 교육 철학이었다.

정리하면, 공자의 본래 뜻은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그 사람의 수준을 헤아려서 알맞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수준 높은 이야기란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만은 아니며, 어떤 사람에겐 독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계한 말씀이기도 하다. 이는 교육자의 분별력과 인내를 강조하는 조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상대하지 말라’는 표현의 현대적 해석

“상대하지 말라”는 말은 오늘날 일상에서도 *“저 사람은 도무지 말이 안 통하니 더 이상 상대하지 마라”*와 같은 식으로 자주 쓰인다. 이 구절에서 유래한 이 표현은,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할 사람에 대해서는 더 가르치려고 애쓰지 말라는 뜻으로 확장되었다. 원문에서는 명시적으로 *“말하지 마라”*고 금지하는 형태는 아니지만, **“말해주어도 소용없다”**는 뜻을 내포함으로써 사실상 말하지 말라는 권고를 담고 있다.

이러한 현대적 해석은 공자의 본래 의도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공자는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가르침의 효율을 중요시했고, *“더불어 말할 만한 사람”*과 *“말해도 소용없는 사람”*을 구분하였다. 현대어로 “상대한다”는 것은 함께 대화를 나눈다, 응대하여 준다는 의미인데, 공자는 말이 통하지 않을 수준의 사람에게는 깊이 있는 대화를 애초에 시도하지 않는 것이 현명함을 설파한 것이다.

예컨대 현대의 한 해석자는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사람을 일종의 ‘중인 이하’의 사례로 들었다. 그들은 온통 비즈니스와 재테크 이야기만 하고, 인문적 소양이나 공동체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간다움이나 도의에 관한 대화를 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사회 정의나 상생의 가치를 말해줘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므로”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 따라서 이들을 억지로 계몽하려 들면 오히려 반발을 불러일으키거나, 대화 자체가 성립하지 않아 시간과 노력만 잃게 된다. 이 예시는 공자의 가르침이 오늘날에도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사람마다 가치관과 이해력이 다르므로, 전혀 눈높이가 맞지 않는 이에게 자신의 높은 이상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만 “상대하지 말라”는 말을 자칫 인간을 포기하거나 무시하라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공자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한 바는 상대의 수준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것이지, 처음부터 교육을 포기하거나 교류를 끊으라는 것은 아니었다. 앞부분의 **“중인 이상에게는 말해줄 수 있다”**는 부분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높은 가르침까지 주어야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이에게는 우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정확하다.

요컨대 현대에서 “상대하지 말라”는 이 표현은 가르침이나 충고의 한계 설정을 가리킨다. 때로는 어떤 이에게 더 이상 말을 해봤자 통하지 않을 때, 현명한 사람은 뒤로 물러나 침묵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는다. 괜히 고집스럽게 계속 말을 하다가 오히려 관계만 악화되거나 자신의 말만 헛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공자의 본래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 말해야 하고 언제 말을 거두어야 하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인간관계・교육・지혜 전수에 담긴 함의

공자의 이 말씀은 인간관계와 교육 방법, 더 나아가 지혜 전수의 철학에 있어서 여러 가지 함의를 지닌다. 첫째로, 교육의 원칙으로서 *“능력에 따른 교육(因材施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오늘날에도 학습자 맞춤형 교육이나 개별화 수업이 중시되는데, 공자는 이미 두 천년 전에 그러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학생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높은 수준의 지식을 쏟아붓는 것은 교육적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자칫 학습자를 좌절시키거나 오만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 대신 학습자가 이해할 수 있는 단계부터 차근차근 깨우치도록 해야 한다. *“그가 미칠 수 있는 바에 맞춰 말해주는 것, 그것이 그로 하여금 가까운 것부터 깊이 생각하고, 점차 높고 먼 경지에 나아가게 하는 길이다”*라고 한 주석자의 설명처럼 ,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 참된 성취에 이르게 된다.

둘째로, 이 구절은 소통과 인간관계의 지혜를 보여준다. 사람들과 대화할 때에도, 각자의 관심사와 이해 수준을 고려해야 원만한 소통이 가능하다. 너무 앞서가는 이야기나 상대가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면 대화는 단절되고 관계도 멀어지기 쉽다. 공자는 제자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현실적 성공을 지향하는 제자에게는 이상주의적 철학을 강요하지 않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에게는 최대한 높은 경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 이는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대화를 조율하는 지혜라 할 수 있다. 현대의 인간관계에서도, 듣는 이의 성향을 고려하여 말의 수위와 방식을 조절하는 것은 갈등을 줄이고 이해를 높이는 중요한 기술이다.

셋째로, 지혜(道)의 전수 측면에서 볼 때, 이 말씀은 아는 자의 책임과 한계를 동시에 시사한다. 공자는 지혜를 전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상대의 역량을 살펴서 반드시 전해야 할 사람에게는 전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에게는 억지로 전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셈이다. 이는 후대에 전해지는 다음과 같은 격언과도 상통한다:

子曰: “可與言而不與之言이면 失人이요, 不可與言而與之言이면 失言이니, 知者는 不失人하며 亦不失言이라.”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말을 해도 될 만한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게 되고, 말해서는 안 될 사람에게 말하면 말을 잃게 된다. 지혜로운 이는 사람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는다.”)

이 말씀이 전하는 바처럼, 현명한 이는 전할 만한 이에게는 가르침을 아끼지 않고, 전해봐야 소용없는 이에게는 헛된 말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지혜를 전수하는 사람의 자세이다. 공자의 “중인 이상/이하” 구분도 같은 맥락에서, 말을 해서 얻을 사람과 잃을 사람을 분별하라는 뜻이라 할 수 있다. 가령 배울 의향도 능력도 있는 사람에게 말해주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잃는 것이며, 배울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 깊은 말을 쏟는 것은 자신의 말을 헤프게 만들어 결국 아무 효과도 못 거둔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전하는 이는 언제 말하고 언제 침묵할지를 가늠할 줄 알아야 한다. 공자는 이러한 전수의 지혜를 통찰하여 실천했던 것이다.

넷째, 이 구절은 인간 능력의 차이와 한계에 대한 현실 인식을 보여준다. 공자는 인간이 태어나면서 갖게 되는 자질에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실제로 공자는 *“태어나면서 아는 자(上智)는 최고요, 배우면서 아는 자는 그 다음이며, 어려움을 겪고서야 배우는 자는 또 그 다음이다. 어려움을 겪고도 배우지 않는 자는 그야말로 하급이다”*라고도 하였다 . 나아가 “오로지 가장 슬기로운 자와 가장 어리석은 자만이 변하지 않는다” 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은 상위  극소수 천재와 맨 아래의 극단적 우둔한 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교육과 습관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공자의 눈에는 사람마다 교육으로 계발될 수 있는 범위가 다르며, 한계 또한 존재했다. 이는 인간 개개인의 다름을 직시하면서도, 변화 가능한 중간계층에 집중하여 최선을 다하는 현실적인 지혜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기준에서 다소 엘리트주의로 보일 수도 있지만, 공자는 높은 이상을 효과적으로 전파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같이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 즉 이상(理想)을 펼치고 도덕을 전하기 위해서는 그 가르침을 담아낼 그릇을 가려서 부어야 함을 인식한 것이다.

관련된 다른 『논어』 구절들과의 연계

공자의 가르침 중에는 이와 비슷한 취지의 말씀이 여럿 있다. 우선 앞서 인용한 *“말할 만한 사람과 말할 만하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라는 가르침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지혜로운 이는 사람을 알아보고 가르침을 준다는 의미로, 공자의 교육 철학의 핵심을 이룬다. 또한 『논어』 위정(爲政) 편에서 공자는 *“열 corner중 하나를 가르쳐주었을 때 나머지 세 개의 모퉁이를 스스로 돌려서 깨우치지 못하면 다시 반복해서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학습자의 자발적 이해력을 중시한 것으로, 결국 어느 정도 스스로 깨칠 수 있는 사람만이 더 높은 수준으로 인도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공자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만 더 가르쳤고, 그렇지 않은 경우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이러한 원칙은 옹야편 제19장의 메시지와 통한다.

또 다른 관련 구절로, 『논어』 헌문(憲問) 편에 나오는 “무우불여기자(毋友不如己者)”, 즉 *“자기만 못한 이를 벗 삼지 말라”*는 가르침을 들 수 있다 . 겉보기에는 이기적인 처세술처럼 보인다는 지적도 있지만, 주희 등 주석가들은 “나보다 못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 친구가 되려는 것은 물리칠 수 없으나, 내가 굳이 수준이 맞지 않는 사람을 찾아가 사귀지는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 이는 교우관계에서도 자신의 인격 수양에 도움이 되는 이를 가까이하라는 조언이다. 이 맥락 역시, 자신보다 현저히 덕이나 지혜가 부족한 사람과는 깊은 교분을 맺지 말라는 것이니, *“중인 이하와는 어울리지 말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결국 가르침을 주는 관계뿐 아니라 사귐에 있어서도 서로 통하는 수준이 중요함을 강조한 셈이다. 공자는 “군자는 위로 통달하고 소인은 아래에 통달한다” 고도 하였는데, 군자는 높은 도리를 깨달은 사람이요, 소인은 눈앞의 이익에만 밝은 사람이므로, 애초에 추구하는 바가 다르면 진정한 교류가 어렵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공자의 이 말씀은 **“君子上達, 小人下達”**이라는 구절과 짝을 이루어 이해할 수 있다 . *“군자는 위를 통달하고, 소인은 아래를 통달한다”*는 이 말은, 군자는 하늘의 이치와 큰 도리를 통하고, 소인은 세속적인 일에만 통달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곧 앞서 말한 *“중인 이상에게는 상을 말해도 된다”*는 부분에 상응한다. 군자라 불릴 만한 사람, 또는 군자가 되고자 노력하는 중인 이상의 사람은 형이상학적 진리나 도덕적 이상을 이해하고 추구할 수 있지만, 소인배에 속하는 중인 이하의 사람은 형이하의 일—즉 눈앞의 현실적 이익과 사사로운 계산—만을 좇기에 높은 뜻을 이야기해줘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 실제로 공자는 *“소인은 천명을 알지 못하여 두려워하지 않고(하늘의 도리를 모르며), 대인에게 함부로 굴고,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긴다”*고 하였다 . 이는 수준 낮은 사람일수록 큰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히려 비웃거나 무시하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속담으로 표현하는 상황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요약하면, 공자의 “상대하지 말라”는 취지의 가르침은 교육에서나 인간관계에서나 지혜롭게 분별할 것을 가르친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공정한 듯 보이나, 실제로는 각자의 그릇에 맞는 내용을 줄 때 비로소 서로에게 유익하다는 것이다. 공자는 뛰어난 제자들에게는 아낌없이 높은 가르침을 주었고, 둔한 제자들에게는 기초적인 가르침만으로 스스로 깨우치길 기다렸다. 이러한 공자의 태도는 사람을 가려서 대했다기보다는 사람에 따라 가장 알맞게 대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상대하지 말라”*는 말은, 상대를 철저히 이해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라는 더 큰 지혜로 연결된다. 공자의 이 한 구절은 오늘날에도 *“아는 만큼만 말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된 자에게만 가르치라”*는 소통과 교육의 금언으로 깊은 울림을 준다.  

논어 옹야편 제19장의 ‘상대하지 말라’ 구절 분석

원문과 번역

原文: 子曰: “中人以上, 可以語上也; 中人以下, 不可以語上也.” 
번역: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중간 수준 이상의 사람에게는 높은 것을 말해줄 수 있지만, 중간 수준 이하의 사람에게는 (그와 같은) 높은 것을 말해줄 수 없다.” 

위 구절에서 **중인(中人)**은 혈통이나 신분이 아닌 지적 수준이나 자질이 중간인 사람을 가리킵니다 . **상(上)**은 높은 수준의 지식이나 고차원적인 이치(일각에서 형이상, 즉 형이상학적 진리로 해석하기도 함)를 의미합니다 . 따라서 이 구절은 지적 수준이 어느 정도 이상인 사람에게만 높은 수준의 가르침이나 이치를 전할 수 있고, 그보다 낮은 수준의 사람에게는 그런 높은 가르침을 직접 전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흔히 현대어로 요약하여 **“수준이 낮은 사람과는 상대하지 말라”**는 식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곧바로 이 원문의 취지를 풀어 말한 것입니다.

주석과 전통적 해설

공자의 이 말씀에 대한 주희의 논어집주(論語集註) 등 전통 주석은, 이 구절을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조언으로 해석합니다. 주석에서는 *“語(어)는 告(고)이다”*라고 하여, 여기서 語는 알려준다, 가르쳐 말해준다는 뜻임을 밝힙니다 . 즉 “남을 가르치는 자는 반드시 그 사람의 수준의 높고 낮음에 따라 말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말이 쉽게 (상대방에게) 들어가 등급을 뛰어넘는 폐단이 없을 것이다.” 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躐等(낄낄등)”, 즉 등급을 뛰어넘는 폐단이란, 상대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높은 단계의 것을 가르칠 때 생기는 문제를 가리킵니다.

장경부(張敬夫, 장식으로도 불림) 등 송대 유학자의 주석도 같은 취지를 강조합니다. 그는 *“성인의 도(道)는 정밀한 것이든 거친 것이든 두 가지로 나뉘지 않지만, 가르침을 베풂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재질(才能)에 따라야 한다”*고 전제한 뒤 , “대개 중인 이하의 자질을 지닌 이에게 갑자기 너무 높은 것을 말해주면, 단지 받아들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장차 망령된 뜻으로 등급을 뛰어넘어 자신에게 절실하지 않은 것을 추구하는 폐단이 생기고, 결국 (발전하지 못하고) 낮은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그가 미칠 수 있는 바에 맞추어 말해주는 것이니, 이렇게 해야 (배우는 이로 하여금) 간절히 묻고 가까운 것부터 생각하게 하여 점차 높고 먼 경지에 나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해설했습니다. 요약하면 학생을 가르칠 때는 그 사람의 능력과 재질에 맞추어야 하며, 너무 높은 수준의 내용을 섣불리 가르치면 오히려 이해도 못 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헛된 생각만 하게 되어 발전을 못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가르쳐서, 질문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서서히 높은 경지로 이끌어야 함을 강조한 해설입니다.

구절의 맥락과 공자의 본래 의도

이 말씀은 논어의 옹야편(雍也篇) 제19장에서 등장하는데, 공자가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 원칙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당시 공자는 여러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각자의 능력과 자질 차이를 깊이 느꼈을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제자는 한마디 힌트만 주어도 스스로 터득해 나가지만, 다른 제자는 기초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주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공자는 이런 경험을 통해 **“사람을 가르칠 때 그 사람의 수준을 넘는 높은 이치를 너무 빨리 말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곧 가르침의 적절한 한계를 설정하는 것으로, 학습자의 준비도와 흡수 능력을 고려한 교육을 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공자의 본래 의도는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동일한 깊이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다는 현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는 결코 “수준이 낮은 사람은 상종도 하지 말라”는 식의 배척이 아니라, 교육에서 단계적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실제로 공자는 제자들의 성향과 재능에 따라 가르침을 달리 한 많은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제자가 같은 질문을 했을 때도, 질문자의 사람됨에 따라 서로 다른 대답을 한 사례(子路와 冉有에게 “과단성 있게 나아가라” vs *“신중하게 물러나라”*라는 상반된 답변을 한 일 등)가 유명합니다. 이러한 일화들은 공자가 사람에 따라 맞춤형 교육을 했음을 보여주며, 본 구절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공자는 배우는 이의 역량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르쳐야 효과가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

‘상대하지 말라’ 현대적 표현의 의미와 원문과의 연결

앞서 언급했듯, 이 구절은 현대에 흔히 **“중인 이하와는 상대하지 말라”**는 식으로 요약되곤 합니다. 이 표현만 들으면 마치 공자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아예 상대도 하지 말라고 한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의 취지를 정확히 살펴보면, 여기서 “語上(어상)”, 즉 *“높은 것을 말해줌”*에 초점이 있습니다 . 다시 말해 지적 수준이 낮은 사람에게는 높은 차원의 이야기나 가르침을 하지 말라는 뜻이지, 그 사람 자체를 멀리하거나 인간적으로 상대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공자는 인격적으로 어진 **어진이(仁者)**라 불렸으며, 평소 지위고하나 빈부를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습니다. 다만 가르침의 내용과 깊이를 조절한 것입니다. 현대어 **“상대하지 말라”**는 표현은, 어떤 분야의 대화를 상대와 맞추지 말라는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 맥락에서 “상대”란 **토론이나 가르침의 **상대**를 뜻하며, 지혜/지식의 수준 차이가 큰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높은 수준의 이야기를 억지로 해봐야 소용 없다는 의미입니다. 공자의 본의도와 연결 지어 보면, **“중인 이하에게는 높은 이치를 말하지 말라”**는 것이 곧 **“수준에 맞지 않는 논의나 가르침으로 괜히 상대를 하지 말라”**는 현대적 표현으로 바뀐 것입니다. 결국 이 말은 상대방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방이 소화할 수 없는 이야기는 해봤자 이익이 없다는 현실적 지혜를 나타냅니다.

인간관계·교육·지혜 전수의 철학적 함의

이 구절은 교육 방법에 관한 조언이지만, 넓게 보면 인간관계 전반과 지혜의 전수에 관한 철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교육 철학적 함의를 살펴보면, 공자는 학습자의 수준과 준비도를 철저히 고려한 맞춤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오늘날 말하자면 *“학습자 중심 교육”*이나 *“개별화 수업”*과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현대 교육학에서 말하는 *“스캐폴딩(scaffolding)”*이나 “적정 수준의 도전 (ZPD: 근접발달영역)” 개념처럼, 공자 역시 무턱대고 최고 수준의 지식을 주입하기보다, 현재 수준에서 약간 높은 정도의 가르침을 통해 단계적으로 유도하는 방식을 옹호한 것입니다 . 이는 지혜 전수의 점진성을 보여주며, 궁극적으로 큰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면 작은 깨달음들을 차근차근 쌓아가야 한다는 철학과도 통합니다.

또한 이 원칙은 인간관계에서 소통의 방법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이해 수준이나 상황을 무시하고 자기 말만 높이 한다면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눈높이에 맞춰 대화를 이끌어가는 것이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이는 친구 관계나 조직 생활에서도 유효하여,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리한 충고나 고차원적 논의를 강요하지 않고,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설득하고 이끌어야 효과가 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공자가 말한 *“중인 이하에게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소통의 기술인 셈입니다.

나아가 지혜의 전수(傳受) 측면에서 보더라도, 이 말은 지혜를 전할 때 지켜야 할 단계와 품격을 가르칩니다. 모든 진리를 함부로 드러내지 않고, 제대로 이해하고 받을 준비가 된 이에게만 단계에 맞게 전수하는 것은 예로부터 현인들의 전통이었습니다. 공자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도, 때로는 명확히 답하기보다 힌트를 주거나 다른 각도로 답하여 스스로 깨닫게 유도했는데, 이러한 *“답하지 않음으로써 답한다”*는 식의 교육법도 결국은 배우는 이의 수준을 고려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논어 *술이편(述而篇)*에서는 공자가 *“분발하여 애써 알려고 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말하려 해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지 않으면 깨우쳐주지 않는다. 한 모퉁이를 들어 가르쳐주고 나머지 세 모퉁이를 스스로 돌려보이지 못하면 다시 반복해 설명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 (“子曰: 不憤不啟,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는 구절로 유명합니다.) 이처럼 학습자의 자발성과 이해력을 중시하며, 스스로 깨닫게 하는 교육을 중시한 공자의 태도는, 왜 준비 안 된 사람에게 높은 가르침을 피해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배우는 이가 충분히 알고 싶어하고 (憤) 답답해할 때 비로소 가르침을 열어주는 것이지, 그 전에는 성급히 모든 것을 가르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옹야편 제19장의 가르침은 공자가 생각한 ‘효과적인 가르침의 자세’의 한 요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이 구절이 담은 철학적 함의는 **“교육과 지혜 전수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인간관계에서 소통도 상대의 역량과 처지에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리하게 수준 높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듣는 이를 배려하지 않는 것이고, 결국 지혜도 전달되지 못한 채 공허한 말잔치로 끝나기 쉽습니다. 반대로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시작해 서서히 수준을 올려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 전수의 길임을 공자는 천명한 것입니다.

관련된 다른 논어 구절들과의 연계

공자의 이러한 가르침 태도와 인간관계 원리는 논어의 다른 구절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관련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무우불여기자 (無友不如己者)” – 나보다 못한 이를 벗삼지 말라: 논어 학이편 제8장에 나오는 구절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충성을 다하고 신의를 지키는 것을 으뜸으로 하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친구로 사귀지 말라, 허물이 있으면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라.’” 라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나보다 못한 사람”*이란 단순히 능력이나 지위가 낮은 사람이 아니라 덕행(德行)이나 인품이 자신보다 부족한 사람을 뜻합니다 . 공자는 벗을 사귐에 있어 자신을 높여줄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을 벗하라고 권했고, 자기보다 덕이 부족한 이를 일부러 찾아가 사귀지는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해의 소지가 있어 후대에 여러 해석이 붙었지만, 취지는 교우(交友) 역시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옹야편 19장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데, 둘 다 자신보다 수준이 한참 낮은 이와의 교류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현실론입니다. 다만 한쪽은 가르침의 맥락이고, 한쪽은 사귐(우정)의 맥락일 뿐입니다. 두 경우 모두 상대를 업신여겨 배척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 발전과 올바른 도를 위해 가려 사귐과 가려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 “민가사유지 불가사지지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 백성은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그 이치를 모두 알게 하기는 어렵다: 논어 태백편(泰伯篇) 제9장에서 공자는 *“백성은 (바른 길로) 따르게 할 수는 있어도, 그 이치를 모두 깨닫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 이는 일종의 정치나 교화(敎化)에 대한 언급인데, 일반 민중이 왜 그러한 도리나 제도가 필요한지 완전히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은 쉽지 않으므로, 우선은 그들이 따르게 만드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 어떤 해석자들은 이를 두고 공자가 백성을 지적으로 계몽시키기보다는 복종시키는 것을 중시한 것 아니냐며 비판하기도 하지만 , 맥락을 보면 공자 역시 백성들의 “깨달음의 정도”를 고려한 현실적 조언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즉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처럼, 너무 심오한 이치를 일반 백성에게 일일이 이해시키려 하기보다, 점진적으로 교화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결국 수준에 맞는 가르침의 중요성을 말한 것으로, 옹야편 19장의 취지와 상통합니다. 실제로 도올 김용옥 같은 현대 학자는 이 구절을 노자(老子)의 무위자연 사상과 연결지으며, 윗사람은 정책을 펼 때 아랫사람의 깨달음 수준을 감안해야 한다는 식으로 풀이하기도 합니다 .
• “유상지어하여 불이가(唯上智與下愚不移)” – 최고의 지혜로운 이와 최하의 어리석은 이는 변하지 않는다: 논어 양화편(陽貨篇) 제3장에서 공자는 *“오직 최상의 지혜와 최하의 우둔만은 (가르침으로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 이는 사람의 타고난 자질에 대한 언급으로, 아주 총명한 사람은 이미 완숙하여 변할 필요가 없고, 아주 어리석은 사람은 가르쳐도 소용없을 만큼 변화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 중간 단계의 대다수 사람들은 학습과 노력에 따라 위로도 아래로도 갈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 후대 학자들은 이 말을 발전시켜, 한나라 동중서의 *성삼품설(性三品說)*에서는 인성을 상·중·하 세 등급으로 나누어 상과 하는 변하지 않고 중은 교화에 따라 선악으로 갈린다고 설명했고 , 송나라 형확(邢確)은 이를 아홉 등분으로 세분화하여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 중요한 것은, 공자가 이미 사람의 재능과 지혜의 차이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옹야편 19장의 전제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중인 이상”*과 *“중인 이하”*로 나눈 것도 결국 인간 집단의 중간 수준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를 구분한 것이며, 상위 부류는 보다 높은 이야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이들이고, 하위 부류는 아직 기초적인 것부터 다져야 하는 이들인 셈입니다. *“상대하지 말라”는 표현은 바로 이 하위 부류에게는 섣불리 높은 것을 주입하지 말라는 뜻인 것이죠. 공자 스스로도 가장 어리석은 부류는 교화가 어려움을 인정했는데(“썩은 나무는 조각할 수 없다”*며 제자 재여를 한탄한 일화가 유명합니다 ),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자는 현실적으로 가르침이 통하는 대상과 통하지 않는 대상을 구분했던 것입니다. 다만 그는 대부분의 보통 사람(중인)은 교육을 통해 개선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중인 이하”*에게도 적합한 수준의 가르침을 주어 점차 끌어올리는 것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以上을 종합하면, 공자의 옹야편 제19장 “상대하지 말라(중인 이하 불가이어상야)” 구절은 교육적 현실주의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을 한 가지 방식으로 대하거나 동일한 수준의 지혜를 강요하지 않고, 각자의 수준에 맞게 단계적으로 가르치고 사귀는 것—이것이 공자가 추구한 인간관계와 교육의 도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 가르침은 유효하여,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그 수준에 맞게 이끌어주는 것이 참된 지혜의 전수 방법임을 일깨워줍니다  . 이는 교사와 제자 사이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지혜라고 하겠습니다.

참고 문헌: 논어 집주 및 다양한 주석서  , 관련 논어 원문 구절들   , 왕수인 등의 교육 해석 , 현대 학자들의 해설 등. (모든 인용은 본 답변을 위해 원전과 주석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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